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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0. 11. 01:59

출처 : 한팩뷰 2012.10월호

보다 빨리 보기 위해 본문을 복사해서 붙입니다.

글자체에 저작권이 있지만, 배포에 관한 언급이 없어서 붙였습니다만, 혹 위반시 바로 글을 내리겠습니다.

 

 

단막극(Enaktare,1888-1892).
 스트린드베리이는<미스 쥴리>를 출판하기 전 이미 인간심리를 다룬 심각한 단막극들을 소개했다. 형식상으로는 단막극인 <미스 쥴리>와 <채권자>는 하룻저녁의 공연을 요하는 짧지 않은 극이기에 자연주의 극 장르 에 분류시켰고, 작품의 줄거리가 중단되는 것이 결코 용납되지 않는 극들을 분리시켜 진정한 ‘단막극 (Enaktare)’이라 불렀다.
 반면에 여러 막의 극은 줄거리가 진행되는 동안 장면이 변화되지만, 단막극은 짧은 공연시간을 요하기에 모든 주어진 상황에서 단 한번에 최대한의 긴장감을 끌어내는 구성이 그 특징이다. 스트린드베리이는 심리적 측면에 비중을 두고 비유적인 묘사를 줄인, 현대 단막극 형태를 창조해 냈다. 아울러 심리적인 것 뿐만 아니라 현실을 상기시키는 스트린드베리이적 단막극은 생활 속의 아주 작은 공간에서도 공연이 가능토록 만들어
졌다. 까페, 상점, 농가, 호텔방 등 어디서든지 무한히 무대를 만들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1888년 여름, 니체의 사상을 읽은 스트린드베리이는 같은 해 12월, 니체와 서신교환을 시작했다.
 <강한자(Den starkare)>, <천민(Paria)>, <사뭄(Samum)>은 니체의 영향을 받은 단막극으로 모두 ‘초인사상’과 ‘힘의 의지’에 의거해 창작되어진 것에 주목할 만하다. 세 작품은 궁극적으로 강한 자가 투쟁에서 승리
한다는 것을 의도하며 형식 역시 공통점을 갖고 있다. <강한 자>와 <사뭄>은 공연시간이 약 15분에 그친다. <천민>은 울라 한쏜(Ola Hasson, 1860-1925)의 단편소설을 임의적으로 재구성하여 드라마화한 것으로, 이 작품들은 코펜하겐에서 그가 새로 시작한 <스칸디나비아 실험극장>을 위해 탄생시킨 실험극들이다.
 덴마크에 머무는 동안 ‘스칸디나비아 실험극장’으로 인해 최악의 경제적 상황에 처한 스트린드베리이는 그 후 3년간 연극에 등을 돌렸다. 그러나 그가 다시 극작가로 되돌아 왔을 땐, 풍자적 동화극인 5막극, <천국의 열쇠들(Himmelrikets nycklar, 1892)>과 함께, 1892년 3월부터 9월 사이 <차변과 대변(Debetoch Kredit)>, <첫 경고(Första Varningen)>, <죽음 앞에서(Inför Döden)>, <모성애(Moderskärlek)>, <불장난(Leka med Elden)>, <끈(Bandet)> 등, 앞선 세 편에 이어 여섯 편의 단막극을 더 세상에 선보였다. 단막극으로 가장 많이 공연되어지는 것은 <강한 자>와 더불어 <불장난>과 <끈>이 꼽힌다.


강한자(Den starkare, 1988/89)
 스트린드베리이는 문제의 <미스 쥴리>와 <채권자>를 극장들이 결코 공연할 용기가 없다는 것과, 아내 시리가 다시 무대에 복귀하는 것을 갈망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여 순회극단을 위한 실험극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 후 1888년 12월 마지막 주, 프랑스 ‘15분 단막극(Quatred'heure)’에서 영감을 얻어 시리를 위한 첫 번째의 15분 단막극 <강한 자>를 선보였다. 이 극은 흥미로운 ‘보조역’과 함께 긴 독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모노드라마에 분류하지만, 모놀로그와 듀오드라마의 결합이라고 볼 수 있다.
 등장 인물은 기혼자인 여배우 X부인과 미혼인 마드모아젤 Y(무명으로 정신과 의사의 표현으로 ‘타락녀’) 단 두 사람이다. 그들은 크리스마스 이브에 한 여성 까페의 구석진 자리에서 만났다. 줄거리는 <채권자>와 마찬가지로 ‘권력에의 의지’에 기초하여, 한 남자를 두고 두 여자가 기 싸움을 펴나가는 것이다. Y는 미혼에 자녀도 없으며 전속배우도 아닌 반면, 세 자녀를 슬하에 두고 있는 X부인은 남편의 영향력 덕분에 이름있는 극장의 전속배우로 활동하고 있다. 그녀에게 바람 피우는 남편과의 결혼은 좋은 배역을 맡아 동경하던 배우가 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극의 마지막 부분에서 장황한 X부인의 독백이 계속되는 동안, Y양은 한 마디 말도 하지 않고 침묵으로 반응한다. 그 독백을 통해 마드모아젤 Y가 X의 남편과 부적절한 관계에 있었거나 어쩌면 현재도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X부인이나 관객들은 명백하게 알 수 있다. 처음에 그녀는 격분한 상태였지만, 자신이 승리자란 듯 Y를 측은한 눈으로 바라보며 마음을 가라앉힌다. 과연 누가 강한 자일까?  그 점에 대해서는 스트린드베리이 자신도, 그 누구도 명확하지 않은 가운데 작품의 긴장감을 끌어내려고 했다. 극이 무대에 오르기 며칠 전, 그는 X부인이 강한 자라고 천명하며 X부인을 제대로 형상화시킬 수 있도록, 시리가 어떻게 연기를 할 것인지 지침서를 작성하여 주었다. 그가 X부인이 강한 자라고 표명한 의도는 “강한 자: 다시 말해, 부드러운 자, 몸이 경직될 정도로 결함을 보이지만, 재치 있게 비켜나가며 자리를 뜰 수 있는 자.” 그것은 X부인이 그녀의 라이벌에게 남긴 마지막 대사가 요약해 준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봐서 넌 이미 내 남편을 잃은 거야... 넌 다른 사람에게서 배운다는 것을 모르잖아, 더욱이 머리를 숙인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겠지 -그래서 마치 마른 갈대처럼 부서져 버린 거야 - 그런데 난 그렇지 않으니 어쩌지! --- 아무튼 내 남편에게 사랑하는 방법을 가르쳐줘서 고맙지 뭐야! - 어서 집에 가서 그이와 사랑이나 나눠야겠군!” <강한 자>는 때론 모노드라마로 규정되어지지만, 작가가 의도적으로 독백과 듀오드라마를 결합시킨 작품이다. 일반적으로 몇 명의 조연들과 주인공은 풍자적으로 비교되며 주인공이 부각되지만, <강한자>에서는 X부인 스스로 자신의 모든 것을 알게 만든다. 감정을 억누르는 두 사람의 연기는 X부인의 독백을 강하게 만들어 인물의 특징을 살리기에, 듣기만 하는 Y의 역할은 아주 중요하다. 침묵을 극화시켜 그것에 담긴 의미를 모색하는 것이 긴장감을 최대한 고조시키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X부인은 객관적인 정보를 제공하고 그 정보의 주관적인 해설을 제공한다. 소름끼치도록 혼란스런 느낌을 관객들에게 전달하며 많은 의문점을 남기는 작품이다.

 

천민(Paria, 1989)
니체의 ‘초인사상’에 의거해 6일 만에 태어난 <천민(Paria)>은 <강한자>와 마찬가지로 작가는 니체의 ‘초인사상’에 따라 Y가 아닌 X를 초인 편에 세웠다. 초인적 인물 X와 천민Y, 두 명의 배역만 있을 뿐이다. X의 지성은 Y를 능가하는 것이 분명하지만, X의 Y에 대한 도덕성이 우세한지에 대해서는 토론의 대상이 되리라 생각된다.
 낯선 두 사람의 이름은 방정식의 공식처럼 무명의 ‘타락한 자들’인 지질학자 X와 Y다. 고향에서 나쁜 과거가 있는 X는 젊은 시절 살인을 했지만 붙잡히지 않았고, Y는 환어음을 위조했지만 벌을 받지 않았다.
 대화는 침착하고 부드럽게 시작되지만, 차츰 격렬한 대화로 이어지며 마치 탐정소설처럼 결국 모든 것은 폭로되어진다. Y는 X를 협박한다. 그러나 마지막엔 그의 지성과 강한 의지 덕분에 그 상황을 해결하고 X가 승자가 된다는 줄거리다. X는 죄의식을 품지 않는다. 천둥 소리에 두 사람의 반응을 살펴 보노라면 Y는 형벌이 내려질 것이라는 두려움을 느낀다. 그러나 X는 하나님이 죄를 사하여 주었다고 생각하기에 천둥이 무섭지 않다. 스트린드베리이는 X의 자유로운 도덕관에 서있지만 관객의 입장에선 Y의 연약한 인간적인 측면의 죄의식에 더 동정심이 쏠릴 수도 있다.

 

사뭄(Samum, 1989)
 프랑스 낭시(Nancy)학교의 심령학과 최면술에 근거하여 쓰여진 <사뭄(Samum)>은 알제리의 묘지에서 일어난다. 아랍의 숨막히는 사막의 광풍인 ‘사뭄’은 때론 회오리 바람이 휘몰아쳐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한다. 테마는 19세기 중엽 프랑스와 알제리의 전쟁에서 프랑스가 승리하자, 복수심에 찬, 아랍소녀 비스크라는 애인의 도움을 받아 ‘사뭄’을 이용하여 한 프랑스 군인에게 최면을 걸어 몽롱한 상태에서 죽음을 맞게 한다. 그릇에 흰 모래를 담아 물이라 암시하여 마시게 만들고, 그의 아내에게 정부가 있고 아들이 죽었다는 거짓말을 하며, 마지막엔 그에게 해골을 손에 들게 만들어 그가 죽었다고 말하면서 그 해골이 거울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는 마치 광견병에 걸린 개처럼 발악하다 죽는다. 웅변적인 대사, 깨어있는 최면술, 혼란스런 말과 주술로 인해 난해한 이 작품을 가리켜 작가는 앨런 포(Edgar Allan Poe, 1809-49)적 <사뭄>이라 부르며, 프랑스인 군인에게 자살을 야기시키는 공포의 환영에 사막의 광풍인 ‘사뭄’의 힘을 적용시켰다고 말했다. 19세기 중엽, 아랍의 국가주의는 인기가 있는 테마였다. 또한 <천민>의 집필 때부터 스트린드베리이는 앨런 포의 이상심리적 환각, 인간의 잔혹성과 두려움, 인간 심리를 꿰뚫어 보는 통찰력 등을 극찬했다. 이 드라마 역시 아랍소녀 비스크라와 프랑스 군인 사이의 문제해결을 ‘초인사상’에 두고 창작된 새로운 작품이다.

 

차변과 대변(Debetoch Kredit,1892)
 1891년 스트린드베리이가 스톡홀름으로 돌아와 새로운 ‘실험극’을 구상하며 레스토랑에서의 공연을 계획한 <차변과 대변>을 집필할 무렵 그는 최악의 경제난에 시달렸다. 역시 니체의 ‘초인사상’에 근거한 ‘의사와 아프리카의 여행자’를 묘사한 드라마로 배경은 호텔 방이다. 유명한 의사와 연구를 위해 주목할 만한 아프리카 여행을 하고 막 돌아온, 악셀은 훈장 수여를 받았지만 많은 고난을 겪기도 했었다. 호텔에 투숙을 하자 한때 그의 성공을 위해 도움을 준 편치 않은 채권자들이 그곳에 나타난다. 불편한 관계의 사람들이 호텔 방에 모두 모였고, 그는 모든 가혹한 심문을 당한다. 결국 악셀은 빚 갚을 돈이나 적절한 해결책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형에게 환어음 한 장을 지불하고, 이중으로 약혼을 하고 조건이 유리한 쪽을 택하려고 노리고 있는 옛 약혼녀에겐 약혼반지를 돌려준다. 출세를 위하여 단지 악셀을 이용하기만 했던 술에 찌든 학자 린드그랜에게는 냉담했다. 물론 옛 애인은 고려의 여지없이 버려진다. 사과하는 뜻과 자살을 상징하는 열지 않은 청산가루 병을 남겨 그들의 눈을 속인 악셀은 그곳으로부터 도망을 친다는 스토리로, “아무튼 그 복잡한 일들을 해결할 수 있었던 남자를 생각해 보라구!”라고 극찬하며 결론 짓는다. 왜 저명한 남자가 때론 비굴하게
자신이 책임져야 할 일에서 도망을 치는지는 스트린드베리이가 자신이 목격한 것을 밝히고 싶은 사실을 테마로 삼으려는 개인적인 필요성에 의해 착안한 희곡이다.


첫 경고(Första varningen, 1892)
 엘레강스한 스타일에 질투가 테마인 <첫 경고>는 ‘경고적 드라마’가 아닌 열정적인 부부를 그린 코미디로, 스트린드베리이의 드라마에서 예술적으로 가장 평가를 받지 못하는 작품이라 알려져 있다. 그러나 능수능
란한 대사 덕분에 관객들은 의견이 분분하다.
 모든 성공을 손에 쥔 중년부인과 함께 극은 시작 된다. 대령으로부터의 꽃다발은 아직도 그녀가 매력적이라는 것을 증명해 보여주고 그녀는 남편을 경시한다. 그녀의 남편은 그녀로부터 멀어지려 노력하지만 허사로 돌아간다. 주인공 악셀 씨는 종종 아내가 늙고 얼굴이 못생긴 여자길 희망했다. 남편이 자신을 너무 사랑하기에 오히려 남편에 대한 감정이 식어버린 아내, 가수인 아내를 좋아하는 사람들에 대한 질투로 너무 고통스런 나머지 남편은 그녀 곁을 떠나 있기로 결정한다. 여섯 번 아내 곁을 떠났고, 일곱 번째 떠나려고 하는 순간, 다행히도 그녀의 앞니 한 개가 빠지는 일이 일어났다. 당혹스런 상황에 처한 그녀는 남편이 남작부인과 딸이 함께 있는 것을 우연히 목격하게 된다. 그때부터 돌변하여 부드러워진 아내의 태도는 단지 그녀가 느낀 질투뿐만 아니라 처음으로 빠진 앞니 때문에 충격을 받고 자신이 늙어간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는 결론에 이른다. 결국 두 사람은 화해하고 함께 여행을 떠난다는 형태로 해학적이며, 입술엔 미소를 짓고 있지만 서로 이를 악물고 결혼생활을 영위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이 드라마는 <죽음의 춤>에 나오는 부부의 10년 이른 단계를 보는 듯 한 소름끼치는 부부의 애증관계를 느낄 수 있다. 이 드라마 역시 병적인 질투심으로 단편 <결혼 II>에서 공개적으로 시리에게 굴욕을 안긴 후, 냉담해진시리의 태도에 괴로워했던 작가 자신의 삶을 반영시킨 작품이다. 1893년 베를린 초연에 뒤이어 1912-25년 사이 100회 공연을 가진 후, 1907년 최초로 스웨덴 무대에 소개되었고, 1910년 <인팀마 테아테르>에서 <채권자>와 함께 공연 되었다.


 

죽음 앞에서(Infördöden, 1892)
 <죽음 앞에서>의 듀랑 씨는 세 딸을 슬하에 둔, 스위스의 여관 주인이다. 파산 직전에 처한, 주인 듀랑 씨는 피곤한 삶에 지쳐있다. “아빤 피곤해서는 절대 안돼, 아직 부양해야만 하는 세 딸이 있잖아, 우리 결혼지참금을 잊으면 안 된단 말이야!”라고 딸은 그에게 질책한다. 그는 어쩔 수 없이 호구지책으로 고양이 먹이로 준 우유와 쥐 덫에 매달아 놓은 치즈조각을 먹고 연명하고 있다. 죽은 아내를 생각하고 아끼는 마음에 진실을 밝히고 싶지 않았지만, 절망에 빠진 그는 그의 죽은 아내가 딸들 앞에서 거짓말을 한 것에 기인하여 어떻게 지금의 비참한 상황에 이르렀는지 폭로하게 된다. 감사할 줄 모르는 딸들이 생명보험과 화재보험을 탈 수 있게 하기 위하여, 그는 집에 방화를 하고 화염 속에서 자살한다는 비극적인 이야기다.
 이 작품을 쓸 당시 스트리드베리이가 당면한 문제는 아내 시리가 자식들, 특히 두 딸 앞에서 아버지에 대해 비방을 할 것에 두려움을 느끼던 순간에 쓴 작품이다. 시리와의 결혼생활이 되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이르자 “너희 엄마가 나에 대해 말하는 것을 그대로 믿는다면, 너희들은 이렇게 끔찍한 여자들이 될 것이다”라는 말을 추가하여 두 딸에게 주는 다섯 번째 ‘경고적 드라마’다. - 스트린드베리이는 이 드라마를 보도록 큰 딸 카린에게 입장권을 사주기까지 했다고 한다. 이 작품 역시 조국에서 배척되어 독일에서 첫 공연을 가졌고, 스웨덴에서는 1907년 순회공연이 있었으며 1910년, 스트린드베리이의 <인팀마 테아테르>에서 청년기 드라마 <자유사상가>와 함께 막을 올렸다.

 

모성애(Moderskärlek,1892)
 네 번째 단막극, <모성애>는 딸들을 위해 쓴 ‘경고 드라마 No.2’로, “만일 너희들이 빠른 시간 안에 엄마와 그녀의 친구로부터 자유로워지지 못한다면 이 극처럼 되어질 것이다.”라는 경고문을 덧붙였다. 이 작품은 스트린드베리이의 희곡 중 등장인물이 여성들만이라는데 의의가 있다. <모성애>의 제목이 요약해 주듯, 이 희곡은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공상적 사랑과 어머니에 대한 자식의 상상적인 사랑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두 사람의 사랑은 진정한 모성애를 지니지 않은 어머니와, 어머니를 사랑한다는 착각 속에서 갖는 딸의 의무적인 사랑으로 묘사되어진다. 이 극의 중심 인물은 딸이며, 극이 진행되는 동안 네 가지 사실이 폭로되어진다: 과거 어머니의 창녀 생활, 딸과 리센이 배다른 자매란 사실, 아버지를 배신한 어머니의 불륜사실, 딸에 대한 아버지의 경제적 지원 사실이 리센에 의해 밝혀진다. 작품에서 적어도 진실을 말하며 어머니의 정체를 밝히고 억울하게 누명을 쓴 아버지에 대한 사실을 밝히는 역할을 하는 사람은 리센이다. 막이 오르면 관객들은 어머니의 절망적인 과거를 느낄 수 있다. 관객은 딸의 태도에서 무엇인가 어머니의 문제점을 감지 할 수 있지만 어머니는 모르고 있는 상태다.
 그녀의 수치스런 과거를 알게되어 갈등하며 괴로워하는 20세의 여배우인 딸, 헬렌과 여자친구, 그리고 배우들의 옷 담당을 하는 엄마의 여자 친구가 등장인물이다. 어머니는 자신의 수치스런 과거를 딸이 알게 되는 것이 두려워 딸이 아버지와 만나지 못하도록 아버지에 대해 온갖 비난을 늘어놓는다. 게다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과거를 폭로하는 것을 딸이 듣게 되는 것이 두려워, 딸이 외부사람들과 접촉하는 것을 차단시켜 버린다. 그러나 그녀의 계획은 실패한다. 어느날, 친구를 통해 헬렌은 실제로 아버지가 얼마나 훌륭하고 희생적인 사람이며, 오히려 엄마가 정숙하지 못한 삶을 살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딸은 비밀에 싸여있는 정직하지 못한 사람들이 존재하는 퀴퀴한 냄새나 풍기는 더러운 구덩이 같은 환경에서 비밀과 잔소리, 그리고 말다툼이 난무하는 가운데서 자신이 성장한 것을 절감한다. 그러나 그녀가 처한 추한 환경이 너무나 강해서 그곳을 벗어날 가능성이 열렸을 때도 그곳을 벗어나지 못한다. “엄마가 수많은 세월 동안 쌓아 올린 벽을 내가 부셔버릴 수는 없잖아![...] 그래, 드디어 착한 딸이 되었으니 잘 보라구.” ‘경고적 드라마’ 임에도 불구하고 엄마의 이기심과 환경적 요인에서 나오는 숙명적 힘은 소위 스트린드베리이적 창조된 공상의 세계라고 볼 수 있다. 이미 등장인물을 살펴보면 사회계급을 알 수 있고, 상류사회 속의 아버지와 대조적으로 어머니와 어머니 친구의 사회적 배경이 어두운 것을 느낄 수 있다.
 첫 무대는 1900년, <천민>, <차변과 대변>과 함께 베를린에서 있었고 1909년, 스웨덴에서의 첫 무대는 성공적으로 막을 내렸다. 뒤이어 국제적으로 공연되어지며 TV, 라디오극 등 다양한 모습으로 지금까지 다양한 분야 속에서 만나 볼 수 있게 되었다.

 

불장난(Leka med elden, 1892)
 무대 조명 아래 재치있는 대화로 전쟁을 방불케하는 스트린드베리이적 코미디, <불장난>은 그의 드라마 중 가장 많이 공연되어진 작품 중 하나로, 스웨덴 군도의 여름 바닷가를 배경으로, 불장난과 같은 격정의 에로티즘을 그린 것이다. 사실 스트린드베리이는 코미디 작가로 알려져 있지 않기에 블랙코미디라고 불러야 타당할 것이다. 제목이 암시하듯 이 작품은 에로틱한 줄거리로, 라이벌 의식과 질투, 그리고 상대와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름이 없는 등장인물들을 보면 얽혀있는 그들의 인간 관계와 인간성을 발견 할 수 있다. 과연 누가 이 드라마의 주인공일까? ‘친구’가 스트린드베리이의 또 다른 자아가 아닐까? 과연 주인공이 극의 마지막 부분에서 도망쳐 나갈 수 있을까?

 극의 줄거리는 화가와 그의 아내, 화가의 부모와 사촌 여동생이 함께 여름을 보내며 단조롭고 무미건조한 생활을 하던 중, 이혼이 진행중인 26살의 젊은 남자의 방문을 받는다. 그와 화가의 아내가 격정적인 불장난을 시작하기까지 긴 시간을 요하지 않았다. 아무튼 여자의 입장은 확실했다. 그들이 화가에게 자신들의 관계를 고백하자, 즉시 그들이 결혼할 수 있도록 아내를 보내주려 하지만 사랑과 결혼은 별개의 것이었다. 방문객은 선명히 떠오르는 결혼생활이 되살아나자 서둘러 집을 박차고 나가고, 절망에 빠진 화가의 아내는 히스테리를 일으키며 소파에 몸을 던진다. 이 모든 것은 아침 식사 전에 일어난 사건이며, 간단한 스토리의 배경에는 스트린드베리이와 시리의 실패한 결혼생활이 담겨 있었고, 스트린드베리이의 체험이 녹아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두 사람의 이혼이 성립되었을 무렵엔 이미
드라마 <불장난>은 완성되어 있었다. 이 드라마의 성공적인 초연이 1893년 베를린에서 있은 후, 스웨덴에서의 첫 무대가 있기까지는 14년을 기다려야 했지만 성공적인 무대로 받아들여지기까지는 4년이란 세월이 더 요구되어졌다.

 

끈(Bandet,1892)
 가장 자연주의적 작품인 <끈>은 아홉 편의 단막극 중 가장 곤혹스런 것으로, 비극적인 상세한 내용을 담은 스트린드베리이의 이혼소송을 다룬 것이다. 극의 진행은 시간과 장소가 균일하게 이루어진다. 극은 법정에
서 약 한 시간 정도 진행되지만 시간은 가공의 시간이다.
 사실적인 것에 기초한 이 작품은 법정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남작부부의 법정공방으로 스트린드베리이 부부와 동일한 상황을 그렸다. 스트린드베리이와 시리는 굉장히 조심스럽게 결혼에 임했다. 즉, 그들은 교회가 아닌 시민적인 소박한 결혼식을 올렸고, 혼전계약서와 물품 내역 등 재산에 대한 소유권한에 분명한 선을 긋지 않았다. 영원할 줄 믿었던 그들의 결혼생활은 견딜 수 없는 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남작은 친구의 연인인 자신의 아내를 소개하는 것도, 아내의 동의 하에 자신에게 애인이 있다는 자체에 지쳐있다. 지금 그들은 재판정에 서있지만 대중 앞에 자신들의 추한 사생활을 들추어내지 않기로 합의를 보았다. 그러나 아들에 대한 양육권 문제는 둘 다 양보할 수 없었기에, 결과는 두 사람 모두 권리를 박탈당하고 기관에 맡겨지는 판정이 나자 충격을 받는다. 전형적인 스트린드베리이적 결혼은 부부의 애증과 자식의 문제가 우선적으로 다루어진다. 자식이란 ‘끈’이 두 사람을 묶어주고 있기에 결혼을 지속할 수 있었다는 대사를 종종 찾아 볼 수 있다. <끈>의 마지막 장면에서 “신은 왜 지옥같은 사랑을 만들어 인간들에게 고통을 주는 것일까?”라는 고통의 이유에 회한이 묻힌 의문을 던지는 대사에서 쇼펜하우어의 ‘인류를 향한 동정심’의 윤리관을 찾아 볼 수 있
고, 남작의 “우리 부부는 불쌍한 인간들이야!”라는 독백은 이 극을 요약해준다. 1902년, 독일에서 초연, 스웨덴에서는 스트린드베리이의 <인팀마 테아테르>에서 1908년 첫 무대가 올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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